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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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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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이 백제에서 고려까지의 분립되었던 행정체계를 청산하고 하나로 묶어지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다.
  왜구의 침탈로 해남땅에 피난하던 진도를 합하여 해진군이 된 해남현은 1409년(태종9) 갑자기 확대된 영역을 다스리는 관부로서 그 중심치소를 지금의 삼산면 나범리인 구 녹산역지에 새로 성을 축조하여 옮기게 된다. 해진군에 합한 땅은 해남에서 해남현과 죽산현, 그리고 이때에 죽산현에서 분립한 진산현이며, 진도에서 진도군과 가흥현, 임준현이 들어왔다.
  1412년(태종12_ 해진군의 치소를 옥산현에 옮겨 영읍(營邑)한다. 이것이 지지류에 보이는 ‘옥산폐현고지사라향(玉山廢懸古之絲羅鄕)’으로 지금의 삼산면 계동리 뒷산인 성뫼산 토성이다.
  1437년(세종 19) 해남과 진도를 다시 나누어 해남현으로 복귀하고 현감을 두었다. 해남이 현재의 위치인 해남읍성으로 옮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해남과 진도가 다시 나누어지는 시기에서 읍성의 남문루(정원루)가 완성된 1469년(성화 기축년)사이의 어느 때로 추측하고 있다.
  분군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지금의 삼산면 서쪽지역인 송정리 중심에 진도민의 거류지가 생기는데 이것이 진도의 삼촌면으로 육지속의 섬과 같은 지역이 된다.

  1440년(세종22)에는 1432년(세종14)부터 서서히 이동을 시작한 대굴포의 수군처치사영이 완전히 옮겨와서 황원 주량(우수영)에 전라우수영의 본영이 정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1447년(세종29)에는 신갈부곡이, 1448년에는 옥천현과 황원현이 영암에서 해남으로 들어와 대체로 지금의 해남지역과 거의 같은 모습이 되어 조선말까지 큰 변화 없이 존속하였다.
  조선후기의 면리(面里)체계는 임란이후에 마련된 것으로≪여지도서≫(1759년)와 ≪호구총서≫(1789년)에는 화일면, 현이면, 녹산면, 현산면, 산일면, 산이면, 파일면, 화이면, 은소면, 황일면, 황이면, 마포면, 청계면, 비곡면, 장목면, 장서면의 16개면이 나타난다.

  1895년(고종32)의 전국적인 행정개편으로 해남현이 해남군으로 승격되면서 그동안에 해남에 딸려 있던 완도의 서쪽지역을 완도군에 내어주고, 현일 · 현이면을 군일 · 군이면으로 황일면을 황원면으로, 황이면을 문내면으로 고치고 혁파된 황원목장의 자리에 새로 관저면을 만들었다.
또 다음해에는 도서지방을 완도군에 이속시켰는데 1906년 월경지인 진도 삼촌면, 영암의 옥천시면, 옥천종면, 북평시면, 6면을 합하여 23면이 되었다.

  이후 1914년 4월 1일 군면폐합과 함께 완도, 영암, 강진지역으로 인접한 지역을 병합, 23면을 조정 개편하여 13개면으로 하였다.